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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이미지, 3.1절 이미지 일러스트, 태극기 이미지 그림

 

일제와 합병되기 이전의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요?
경제적인 면에서 농촌중간층이 성장해가기 시작했고, 공업 부문에서는 공장제 수공업이 발전을 시작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상업자본과 관료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공장공업도 발달해나가는 시기였지요. 그야말로 근대적인 성장을 위한 도약을 꾀하는 시기였습니다.


유럽이 성장하는 모습도 딱 이러했었는데요.
중간 계층이 부유해지고, 국민들이 먹고 사는데 불편함이 사라지자 과학과 예술에 투자하게 되었지요.


관료가 아닌 국민들에게도 정치적 힘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로인해 민주주의의 기틀이 마련되어 갔습니다.


 

 

 

이 황금처럼 아까운 시기에 일제의 강제적인 합병이 시작됩니다.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총 36년간 이루어졌습니다.
짧다면 짧겠지만, 억겁 같은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겼고, 아파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부터 시작되지만 1905년 이후부터 5년간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탄압을 시작해왔으므로 실질적으로는 1905년부터라고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일제강점기는 3.1 운동을 기점으로 제1기 무단통치기에서 제2기 민족분열통치기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무단통치기에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식민통치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해 공포정치와 탄압으로 반대 세력을 제거해나갔습니다.
일본인에 비해 아주 열등한 민족이라는 의식을 주입시키며 민족적 고유문화를 말살하고자 했습니다.


1911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워 조선을 일본의 식량조달지로 만들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벌였고,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막 성장하고 있는 중간계층의 농민을 소작농민으로 재편성하고, 식량을 수탈하기 위한 봉건제를 공고하게 다져놓았습니다.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 마저도 무너지게 되고, 빈민층이 대거 양산될 것이 뻔하지만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았지요.


토지를 빼앗고, 살기 좋은 곳엔 일본 농민을 이주시켰습니다. 원래 주인이었던 한국민들은 척박한 만주땅으로 내쫓기거나 숟가락마저 빼앗길 정도로 혹독한 삶을 이어가게 되었고요.


 

 

 

조선에서 쌀 900만 석을 생산하여 700만 석을 일본으로 가져갈 목적으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산미증식계획은 실패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으로의 쌀 이출량이 증가되어 1920년의 조선인 1인당 쌀소비량 0.63석에서 1930년 0.45석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세계 공황의 여파가 조선에도 미쳐 농민들의 파산이 속출하고, 산 속에 살거나 걸인이 되어 유랑하는 사람들도 늘었습니다. 일본의 감언이설에 속아 만주나 일본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나기도 했었지요.


 

 

 

일본의 공업제품을 판매하기 위한 시장확보를 위해 회사령을 발포하고 일본제품만 사용하게 합니다. 당시 등장한 독점 재벌이 미쓰비시, 노구찌입니다.


말을 안 들으면 죽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학교에 근무하는 교원, 군수 등 군인이 아닌 일반 공무원까지도 칼을 차고 근무하게 하였습니다. 전국의 헌병과 경찰의 수도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식민통치의 초기 안정을 위해 모든 민간 출판 금지, 교육기관 폐지, 집회 금지를 명했고, 합병에 공이 있는 조선인 친일파를 불러들여 이 모든 일에 조선인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일부러 드러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온갖 굴욕을 겪었으며, 파리 목숨보다 못한 채로 수탈을 당했습니다. 일제가 무력으로 빼앗은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되찾고자 온 민족이 함께 들고 일어서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기미독립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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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정오, 기미 독립 선언서가 발표됩니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서 낭독으로 독립만세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5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진압으로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평화적 시위는 가혹한 무력을 버틸 수 없었고, 목숨을 걸었고, 피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자주적 국민의 저력을 세계에 알렸고, 여러 나라들에게 우리나라 국권 회복에 대한 문제를 바로 볼 수 있도록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단 통치에서 문화 정치로 바꾸게 하여 문관들이 차고 있던 칼을 풀었고,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게 만들었지요.

 

 

 

 

일본은 비열하게도 표면적으로는 보통경찰제도로 바꾸고 부드럽게 나가겠다는 의도를 표방하였으나 사복형사, 밀정 등을 두었고, 경찰 병력을 3배로 증가시켰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전 국민이 똘똘 뭉치는 것이 무서웠던 모양인지 민족분열정책을 위해 친일세력 포섭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지식인과 종교인, 자산이 제법 많은 계급을 골라 조선총독부에서 지방자치제를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친일세력으로 늘려갔지요.

 

 

 

 

3월 1일은 독립만세 운동만 시작된 날이 아닙니다.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 운동의 중추 기관으로 맹활약 하였습니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에 이 날을 국경일로 지정하였습니다. 삼일절은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우리나라 4대 국경일에 속합니다. 여기에 한글날을 포함하면 5대 국경일이 됩니다. 참고로 제헌절은 국경일이지만 법정 공휴일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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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경일에는 태극기를 게양하게 됩니다.
애국선열의 혼과 넋을 기리고, 민족의 정신과 뜻을 이어가기 위해 태극기를 걸게 되는데요.


일제 강점기에 사용하던 태극기는 지금의 태극기와는 모양이 약간 다르지만 1948년에 법으로 제정된 태극기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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